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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안개처럼 깔리고 있었다. 차디찬 바람에도 고갯마루에 선 것은 아홉마리 용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긴 굽이로 비탈을 타는 구룡령 포장도로는 아무래도 용의 몸짓이 아니다. 용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멀리 북쪽으로 안산에서 대청봉으로 달리는 설악산 서북주능이 하늘금을 긋는다. 지나온 백두대간 능선은 묵은 눈을 털어내며 봄 채비로 분주하다. 빈틈없이 어깨를 맞댄 저 봉우리 아래 그동안 만났던 백두대간 사람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까? 남동쪽으로 이어진 만나야 할 산들은 구름에 몸을 감춘 채 대면식이나 치르자며 잠…
백두대간의 심장 오대산. 흐르는 것은 계곡의 물만이 아니다. 자랄 때로 자란 키 큰 전나무에 붙들린 채 은은한 빛을 흘리던 보름달은 남대 지장암의 아침을 깨우는 비구니의 목탁소리와 염불에 놀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을 서두른다. 새벽 3시, 오대산은 벌써 아침을 맞고 있었다. 오대산 주봉 비로봉은 구룡령에서 만월봉-두로봉-노인봉을 거쳐 황병산으로 빠져나가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에서 비켜 나 있다. 그럼에도 백두대간 종주를 나서는 이들은 비로봉을 지나치지 않는다. 비로(1563m), 상왕(1491m), 두로(1421m), 동대(1433…
김수영 시인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며 바람보다 빨리 웃는다’고 풀을 노래했다. 그러나 삼양축산 대관령목장의 풀들은 겨울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하얀 눈 이불을 뒤덮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고개 넘어 바닷가 강릉 경포대에는 벚꽃축제를 알리는 오색등이 화려하게 점멸하지만, 대관령목장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평균 해발 1천m가 넘는 고원지대입니다. 6월6일 현충일에 눈이 내린 적도 있습니다.” 20여년 청춘을 목장에 바쳤다는 배성룡(46) 목장장은 “설악산 공룡능선에 단풍이 들 때쯤이면 겨울채비를 해야 하고 푸른…
수줍은 듯 화려한 진달래 분홍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강릉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정선으로 길을 잇는 삽당령은 팍팍한 먼지길이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됐다는 도로공사는 이제 아스팔트 포장을 남기고 있었다. 연신 살수차가 고개를 오르내리면 물을 뿌려 먼지를 달래보지만 효과는 별로 없어 보였다. 먼지는 4월의 막바지에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태양을 지원군 삼아 기승을 부렸다. 고개만 넘으면 보인다는 동부육종장이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몇 번이나 오르내렸지만 간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짙어만 가는 초록과 초록…
기우제를 올리면 어떠한 가뭄에도 비를 내려주었다는 고마운 자병산은 이제 없다. 붉은 뼝대가 사라진 자병산은 이미 자병산이 아니다. 또하나의 자병산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조금씩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 시멘트를 달라고 아우성이면서 시멘트 회사만 나무라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가. 돌아가는 길을 참고 다리를 놓는 것도 조심스러워 하자. 사라지는 자병산을 위로하는 우리들의 최선일 것이다. 보름달이 백두대간 능선을 넘는 늦은 밤이었지만 손영옥(68), 정춘랑(65) 할머니는 여태 잠자리도 펴지 못했다. 이불이 깔려 있어야 할 방에는 초록이 …
산꼭대기에 50개 우물이 있다는 쉰움산은 산이라기보다 차라리 능선에 가깝다. 두타산에서 시작한 능선이 곧게 동쪽 바다로 뻗어내리다 살짝 고개를 든 모습인 쉰움산 정상은 바위로 이뤄져 있다. 바위에는 크기도 가지각색이고 모양도 제각각인 웅덩이가 널려 있다. 언뜻 보기에도 50개가 훨씬 넘어 보이는 웅덩이에는 무당개구리들이 짝짓기에 열을 올릴 만큼 물들이 가득하다. 웅덩이 물은 솟아나는 것이 아닌데도 좀처럼 마르는 일이 없다고 했다. “박통 때 무장공비 나온다고 철거하기 전까지만 해도 쉰움산은 굉장했어요. 수 천명이 득시글댔으니까요…
덕항산은 거대한 벽이었다. 수 백길 뼝대로 울타리를 쳐놓고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덕항산은 정수리를 구름 속에 숨겨놓기까지 했다. 백두대간이 남쪽으로의 긴 여정을 끝내고 남서쪽으로 몸짓을 트는 곳. 11대째 고향 대이리를 지켜오는 이종옥(79) 할아버지는 첫마디에 악산이라고 트집을 잡는다. “저 산이 백두산에서 시작한 낭맥이 닿은 곳인데 악산이에요. 명산은 좀더 내려가야 돼요. 태백산이 명산이지.” 이름 석자나 겨우 익혔다고 뒤로 물러앉으며 덕항산을 깎아내리지만 백두대간 중요 봉우리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덕항산을 깍아내리는 것으로…
백두대간은 피재를 넘지 않는다. 다만 건널 뿐이다. 난리를 피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고 그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 제몫이라는 듯 매봉산과 금대봉을 이으며 서쪽으로 하늘금을 그어 피안의 세계에 경계를 짓는다. ‘수도공동체 예수원 분수령 목장’은 그 금이 막 시작되는 매봉산 어깨쯤에 자리잡고 있었다. 목장에서 내려다보이는 피재의 높이가 해발 910m. 목장의 높이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해발 1000m가 넘는다. 목장에서 바라다 보이는 멀리 동해까지 막힘없이 펼쳐지는 경치는 그대로 천상의 정원이다. “멋있죠. 이런 정원을 가진 사람은 몇…
희미한 경운기 바퀴자국을 따라 전봇대가 산을 오른다. 풀들이 허리까지 자란 길은 들꽃 세상이다. 얼추 헤아려도 수십종이 족히 넘는 들꽃에는 덩치 큰 ‘땡삐’부터 개미까지 꿀을 따느라 분주하다. 꽃에 매달린 작은 생명들은 소나기가 남기고 간 물방울이 때때로 물벼락을 때리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계절의 변화를 아는 그들은 시간을 아끼고 있었다. 밥짓는 연기가 끊긴 지 5년이 됐다는 분지리의 맨 꼭대기 마을 흰드미에 올랐다. 덩그러니 집 한채가 이화령에서 백화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하늘금에 처마를 잇대고 전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