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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가 반드시 모든 영예를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캘리포니아에서 금맥이 처음 발견된 곳은 수터라는 사람이 소유한 땅이다.그러나 그는 곧 이어 광란적으로 일어나는 골드러시 때문에 자신의 땅이 황폐화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결국 알거지가 된다. 태백시에서 석탄이 처음 발견된 곳은 태백산 문수봉(1천5백17)아래의 두메산골 「금천(黔川)」.그러나 이곳은 태백 석탄산업의 호황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처음으로 석탄덩어리가 발견됐지만 정작 자신들은 옆으로 비켜서서 옆 마을들이 번창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다. 『석탄산업이 사양화되는 것…
경북봉화군 유곡(酉谷)마을의 안동 權씨 집안 아낙네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들은 오랫동안 종가(宗家)제사에 쓰던 한과(韓菓)를 대량으로 만들어 시중에 판매하고 있다. 유곡마을은 1380년 충재(충齋)권벌(權.1478~1548)선생이 정착한 곳으로 아직 사대부 집안의 기풍이 서슬 퍼렇게 살아있다. 따라서 집안여인들이 밖에서 일거리를 찾는 것은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한과생산은 유곡마을 부녀회가 맡고 있다.그들은 5년전부터 부업으로 한과를 만들기 시작했다.현재 총무를 맡고 있는 이임형(65)할머니가 유곡마을 …
정감록(鄭鑑錄)은 60여가지에 달한다.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며 내용을 보태고 빼다 보니 이렇게 많아진 것이다.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그러나 중심 내용만큼은 똑같다.「살기 좋은 새 세상」을 바란다는 것이다.재해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못 살았던 옛 시절,새 세상에 대한 기대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단양(丹陽)지방은 「동록잡기(東錄雜記)」라는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다.승지는 살기 좋은 이상향을 말한다. 그러나 단양사람들은 단양땅에서 진정한 승지는 의풍리(충북 단양군 영춘면)라고 말한다. 의풍리의 지형을 찬찬히 살펴보면…
정말 흥부마을 같았다.마을 뒤쪽으로 제비가 날아간다는 연비봉(燕飛峰)이 있고 마을 안쪽 자그마한 호수엔 흥부각이 서있다. 근처엔 놀부의 무덤이라는 박첨지묘가 자리잡고 있다.마을어귀에 있는 돌장승과 서낭당도 예사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흥부마을을 실감케 하는 것은 마을사람들이 죄다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외지사람들은 대개 의심을 품고 마을에 들어서지만 마을사람들에게 곧잘 설득당한다.게다가 경희대 민속학연구소가 현지답사를 통해 만든 보고서를 보여주면 더이상 의심하는 것이 미안할 지경이다.성산리(전북 남원시 동면)는 흥부마을이라 불린다. 성…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53년 만의 금강산 길을 축하라도 해주 듯 반짝이던 육지의 불빛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순간이었다. 남쪽 바다를 지날 때 희미하게나 보이던 백두대간의 그림자마저 묻어버릴 정도로 육지 쪽은 완전한 어둠에 묻혀버렸다. 바다 위의 별처럼 떠 있던 고깃배들의 집어등도 보이지 않는다. 동해항에서부터 쫓아오던 갈매기들만이 배가 일으키는 물살에 떠올라오는 먹이를 노릴 뿐이다. 장전항 소나무는 모두 어디 갔는가 잠시 붙인 눈을 뜨게 만든 것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였다. “조선민주…
난세가 있었다. 믿었던 장군은 적을 치라고 내준 군사를 되돌려 도성을 점령했다. 새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제 앞길을 가리느라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구토 회복을 꿈꾸던 왕은 변방으로 내몰리는 수모 끝에 죽임을 당했다. 충신이 역적이 되고 역적이 개국공신이 되던 이씨 조선 개국기, 강릉 함씨의 두 형제 부림과 부열의 우애도 금이 가고야 만다. 형 부림은 이성계 편에 서서 광영을 누리지만 동생 부열은 공양왕에 대한 충절을 선택했다. 이 때문에 함부열은 고려조의 마지막 충신인 두문동 칠십이현의 반열에 올라 후세의 존경을 받지만 그 후손들…
조심하세요. 어린 나무들은 상처를 입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해요. 보세요. 저렇게 줄기가 두 개인 것이나, 저것처럼 심하게 뒤틀린 나무들은 어릴 때 상처를 입은 것들이에요.” 산이 좋아서 산림청 공무원이 됐다는 박광서(31·인제국유림관리소)씨의 발걸음이 가볍다. “저 나무는 가지가 빨갛죠. 층층나무예요. 요렇게 가지에 무늬가 들어 있는 것은 물푸레나무고요. 저거는 비슷하지만 단풍나무예요. 요거는 고로쇠나무처럼 수액을 뽑을 수 있는 거제수고요. 거제도에 가면 군락지가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고요 버섯은 떡다리에요. 저것은 목이버섯이고요…
점봉산과 설악산을 가르는 한계령 잿빛 아스팔트길은 이리 꺾고 저리 돌며 고개 아래 첫 동네 오색을 비켜가고 있다. 지난 89년 미시령길이 확장되면서 자꾸 줄기만 하는 자동차들도 ‘관광 오색’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안간힘에 곁눈 한번 주지 않고 바쁜 걸음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오색은 거짓말처럼 한산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야 할 약수터에는 몇몇 사람들이 여유롭게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에 물을 담고 있었다. 집단시설지구 50여곳의 식당 주인들은 빼곡이 열어둔 문에 기대어 혹시나 하는 기대로 어쩌다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
사람들은 ‘피래’라고 불렀다. 점봉산이 바라보이는 가리산 기슭에 자리잡은 필례약수. 안내서에는 베틀을 짜는 여인을 닮은 땅의 생김새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여, 약수 위로 옛날엔 큰 동네가 있었어.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지.”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 ‘필예’(必曳)라 부른 것이 피래라는 땅이름의 내력이라는 것이다. 1916년 행정구역 통합으로 귀둔리로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이름은 피래였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필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약수로 세상에 알려진 필례는 한계령 꼭대기에서…
하루종일 내리던 비는 밤새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도 날려버린다는 진동계곡의 모진 바람이 발길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 감추고 싶은 모양이다. 오만한 인간들의 횡포에 속수무책 당해야만 하는 백두대간의 마지막 몸부림은 진눈깨비와 회색안개를 불러 양수발전소 건설을 위해 파헤쳐진 속살을 가린다. 긴 겨울 가뭄을 끝내는 봄비였건만 점봉산(1419m)에서는 인간의 오만을 경고하는 하늘의 분노였다. 양수발전소는 ‘남는 전기를 사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다. 전력소모가 비교적 적은 밤 시간에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잉여전기를 이용해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