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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53년 만의 금강산 길을 축하라도 해주 듯 반짝이던 육지의 불빛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순간이었다. 남쪽 바다를 지날 때 희미하게나 보이던 백두대간의 그림자마저 묻어버릴 정도로 육지 쪽은 완전한 어둠에 묻혀버렸다. 바다 위의 별처럼 떠 있던 고깃배들의 집어등도 보이지 않는다. 동해항에서부터 쫓아오던 갈매기들만이 배가 일으키는 물살에 떠올라오는 먹이를 노릴 뿐이다. 장전항 소나무는 모두 어디 갔는가 잠시 붙인 눈을 뜨게 만든 것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였다. “조선민주…
난세가 있었다. 믿었던 장군은 적을 치라고 내준 군사를 되돌려 도성을 점령했다. 새 권력 앞에서 사람들은 제 앞길을 가리느라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구토 회복을 꿈꾸던 왕은 변방으로 내몰리는 수모 끝에 죽임을 당했다. 충신이 역적이 되고 역적이 개국공신이 되던 이씨 조선 개국기, 강릉 함씨의 두 형제 부림과 부열의 우애도 금이 가고야 만다. 형 부림은 이성계 편에 서서 광영을 누리지만 동생 부열은 공양왕에 대한 충절을 선택했다. 이 때문에 함부열은 고려조의 마지막 충신인 두문동 칠십이현의 반열에 올라 후세의 존경을 받지만 그 후손들…
조심하세요. 어린 나무들은 상처를 입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해요. 보세요. 저렇게 줄기가 두 개인 것이나, 저것처럼 심하게 뒤틀린 나무들은 어릴 때 상처를 입은 것들이에요.” 산이 좋아서 산림청 공무원이 됐다는 박광서(31·인제국유림관리소)씨의 발걸음이 가볍다. “저 나무는 가지가 빨갛죠. 층층나무예요. 요렇게 가지에 무늬가 들어 있는 것은 물푸레나무고요. 저거는 비슷하지만 단풍나무예요. 요거는 고로쇠나무처럼 수액을 뽑을 수 있는 거제수고요. 거제도에 가면 군락지가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고요 버섯은 떡다리에요. 저것은 목이버섯이고요…
점봉산과 설악산을 가르는 한계령 잿빛 아스팔트길은 이리 꺾고 저리 돌며 고개 아래 첫 동네 오색을 비켜가고 있다. 지난 89년 미시령길이 확장되면서 자꾸 줄기만 하는 자동차들도 ‘관광 오색’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안간힘에 곁눈 한번 주지 않고 바쁜 걸음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오색은 거짓말처럼 한산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야 할 약수터에는 몇몇 사람들이 여유롭게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에 물을 담고 있었다. 집단시설지구 50여곳의 식당 주인들은 빼곡이 열어둔 문에 기대어 혹시나 하는 기대로 어쩌다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
사람들은 ‘피래’라고 불렀다. 점봉산이 바라보이는 가리산 기슭에 자리잡은 필례약수. 안내서에는 베틀을 짜는 여인을 닮은 땅의 생김새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여, 약수 위로 옛날엔 큰 동네가 있었어.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지.”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 ‘필예’(必曳)라 부른 것이 피래라는 땅이름의 내력이라는 것이다. 1916년 행정구역 통합으로 귀둔리로 바뀌기 전까지만 해도 마을이름은 피래였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필례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약수로 세상에 알려진 필례는 한계령 꼭대기에서…
하루종일 내리던 비는 밤새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도 날려버린다는 진동계곡의 모진 바람이 발길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 감추고 싶은 모양이다. 오만한 인간들의 횡포에 속수무책 당해야만 하는 백두대간의 마지막 몸부림은 진눈깨비와 회색안개를 불러 양수발전소 건설을 위해 파헤쳐진 속살을 가린다. 긴 겨울 가뭄을 끝내는 봄비였건만 점봉산(1419m)에서는 인간의 오만을 경고하는 하늘의 분노였다. 양수발전소는 ‘남는 전기를 사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다. 전력소모가 비교적 적은 밤 시간에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잉여전기를 이용해 하…
구름이 안개처럼 깔리고 있었다. 차디찬 바람에도 고갯마루에 선 것은 아홉마리 용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긴 굽이로 비탈을 타는 구룡령 포장도로는 아무래도 용의 몸짓이 아니다. 용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멀리 북쪽으로 안산에서 대청봉으로 달리는 설악산 서북주능이 하늘금을 긋는다. 지나온 백두대간 능선은 묵은 눈을 털어내며 봄 채비로 분주하다. 빈틈없이 어깨를 맞댄 저 봉우리 아래 그동안 만났던 백두대간 사람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까? 남동쪽으로 이어진 만나야 할 산들은 구름에 몸을 감춘 채 대면식이나 치르자며 잠…
백두대간의 심장 오대산. 흐르는 것은 계곡의 물만이 아니다. 자랄 때로 자란 키 큰 전나무에 붙들린 채 은은한 빛을 흘리던 보름달은 남대 지장암의 아침을 깨우는 비구니의 목탁소리와 염불에 놀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을 서두른다. 새벽 3시, 오대산은 벌써 아침을 맞고 있었다. 오대산 주봉 비로봉은 구룡령에서 만월봉-두로봉-노인봉을 거쳐 황병산으로 빠져나가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에서 비켜 나 있다. 그럼에도 백두대간 종주를 나서는 이들은 비로봉을 지나치지 않는다. 비로(1563m), 상왕(1491m), 두로(1421m), 동대(1433…
김수영 시인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서며 바람보다 빨리 웃는다’고 풀을 노래했다. 그러나 삼양축산 대관령목장의 풀들은 겨울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하얀 눈 이불을 뒤덮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고개 넘어 바닷가 강릉 경포대에는 벚꽃축제를 알리는 오색등이 화려하게 점멸하지만, 대관령목장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평균 해발 1천m가 넘는 고원지대입니다. 6월6일 현충일에 눈이 내린 적도 있습니다.” 20여년 청춘을 목장에 바쳤다는 배성룡(46) 목장장은 “설악산 공룡능선에 단풍이 들 때쯤이면 겨울채비를 해야 하고 푸른…
수줍은 듯 화려한 진달래 분홍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강릉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정선으로 길을 잇는 삽당령은 팍팍한 먼지길이었다.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됐다는 도로공사는 이제 아스팔트 포장을 남기고 있었다. 연신 살수차가 고개를 오르내리면 물을 뿌려 먼지를 달래보지만 효과는 별로 없어 보였다. 먼지는 4월의 막바지에 어울리지 않는 뜨거운 태양을 지원군 삼아 기승을 부렸다. 고개만 넘으면 보인다는 동부육종장이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몇 번이나 오르내렸지만 간판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짙어만 가는 초록과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