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사람들14 오대산- 지친 마음을 벗고 지혜를 받으라
작성일 18-08-28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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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강 조회 240,842회 댓글 0건본문
백두대간의 심장 오대산. 흐르는 것은 계곡의 물만이 아니다. 자랄 때로 자란 키 큰 전나무에 붙들린 채 은은한 빛을 흘리던 보름달은 남대 지장암의 아침을 깨우는 비구니의 목탁소리와 염불에 놀라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을 서두른다. 새벽 3시, 오대산은 벌써 아침을 맞고 있었다.
오대산 주봉 비로봉은 구룡령에서 만월봉-두로봉-노인봉을 거쳐 황병산으로 빠져나가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에서 비켜 나 있다. 그럼에도 백두대간 종주를 나서는 이들은 비로봉을 지나치지 않는다. 비로(1563m), 상왕(1491m), 두로(1421m), 동대(1433m), 호령(1561m)의 다섯봉우리가 모여야 비로소 오대산인 탓이다.
오대산은 높은 산이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움이나 뾰족함이 없다. 비로봉에 서면 설악의 화려함이나 지리의 장대함보다는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 지장암에서 만난 비구니 광문(41) 스님은 문수보살이 지혜의 완성을 상징한다고 일러주었다.
너와 나를 가르고 이긴 자와 진자를 구분하는 것은 지식일 뿐이다. 지식은 결국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이며 고통의 세계로 이끄는 번뇌를 낳을 뿐이다. 온전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 능선은 너와 나를 우리로 받아들이고 승부보다는 공생이 지고지순한 가치임을 깨우친다. 1500m에 가깝게 높이 솟았으면서도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한 오대산의 능선은 높이를 견주는 속세의 시야로는 읽어내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를 간직하고 있다. 어떤 이는 ‘그 무엇’을 어머니와 같은 후덕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죽인 조선의 태종,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음으로 내몬 세조도 결국 그 품에 안겼다. 문수보살이 종기투성이인 세조의 몸을 닦아주고, 고양이들이 자객으로부터 세조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여러 일화들은 세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이긴 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인륜을 저버린 왕까지 보듬을 수 있었으리만큼 오대산은 넉넉한 산이다.
(사진/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 앞으로 백두대간 능선이 지나는 두로봉이 보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오대산 사찰들이 연기로 흩어질 때 상원사를 지켰던 당대의 선사 한암 스님은 잊혀져 가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은 중공군의 합류에 힘을 얻은 인민군이 다시 38선을 넘기 직전 오대산 전 사찰에 대해 소각령을 내렸다. 절집들이 인민군들의 숙소 등으로 쓰이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모든 스님들이 절집을 비웠을 때 한암 스님만은 청량선원의 문짝들을 떼어내 불을 질러 상원사가 불타는 것처럼 위장하고 절집을 끝내 지켰다. 상원사 청량선원의 문들이 제각각 모습이 다른 것은 이때 떨어져 나간 문짝을 형편이 닿는 대로 다시 만들어 달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한암 스님의 흔적은 상원사 위 중대 사자암 뜰의 단풍나무로 남아 있다. 스님이 1926년 봉은사에서 상원사로 올 때 땅에 꽂은 지팡이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은 것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스님은 27년 동안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오대산을 물, 불, 바람의 ‘삼재’(三災)를 입지 않는 명당으로 꼽았다. 임진왜란에 선대왕들의 실록들을 뺏기고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은 선조는 오대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실록을 보관하도록 했다. 오대산 사고는 금세기에 들어서 일제의 수탈을 당하고 한국전쟁 때 불타기 전까지 수 백년 동안 이중환의 말대로 삼재를 입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은 오대산도 예외가 아니다. 수천명의 화전민들이 골짜기를 차지하고 불을 놓을 때도 변하지 않았던 오대산은 변하고 있다. 오대산을 넘어 홍천군 명개로 이어지는 북대령조차 여전히 비포장도로로 남아 있지만 절집들은 옛 모습이 버거운 모양이다. 월정사에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유치원 공사가 끝나는가 싶더니 요즈음에는 박물관을 짓느라 부산하다. 상원사도 2층 한옥으로 된 요사채를 새로 세우느라 고즈넉한 분위기를 찾기 어렵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중대 사자암에는 설악산 봉정암을 닮은 투시도가 새로운 불사를 알리고 있었다. 평소 무시로 드나드는 멧비둘기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곤줄박이 같은 새들도 공사가 시작되면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다.
“기도를 위해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적멸보궁에 이르는 비탈길은 참 힘든 길입니다. 그 고통을 견디며 산길을 혼자 걷다 보면 저절로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광문 스님은 무엇보다 용도에 맞지 않을 정도로 커지는 절집들이 되레 신앙심을 해친다고 걱정이었다. 몸이 편해지면 마음은 게을러지고 나태해진다는 거였다.
옛 조사들은 ‘식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하고 온포(溫飽)에 생해태(生解怠)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춥고 배고플 때 소행할 마음이 나오고 따뜻하고 배부를 때 게으름이 나온다라는 옛 큰 스님들의 말이 언뜻 떠올랐다.
모든 것들이 변해가고 있는데 능선 넘어 서대 염불암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서대 염불암을 알리는 이정표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스님의 부탁으로 치워졌다고 했다. 너와지붕을 인 서대 염불암 스님은 마침 출타중이었다. 출입금지 간판이 서 있지만 그래도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비닐을 친 샘터의 문에 자물쇠를 걸지 않았다. ‘얼음을 직접 깨면 물통이 깨질 수 있으니 통을 두드려 얼음을 깨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샘터에 칫솔은 한 자루였지만 숟가락은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출입금지 팻말을 넘는 길손의 고픈 배를 위한 배려이리라.
서대 염불암 사립문 앞 우통수는 여전했다. 우통수는 훗날 태백산 창죽동 금대산 검룡소가 한강의 시원지로 밝혀지기까지 오랜 세월 한강 물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대접받던 샘이다. 세조가 갈증을 풀기도 했다는 우통수는 단종이 마지막 숨을 거둔 영월 동강을 지나 한강으로 흘러 든다. 단종은 죽어서도 세조의 손길을 피하지 못하는 셈이다.
“기존의 지친 마음을 벗고 빈 마음으로 오라. 오대산에 들어 부처님과 자연을 마음으로 받아라.” 북방에서 제일 가는 비구니 선방이라는 남대 지장암을 지키는 광문 스님이 속인들에게 전해 달라는 초청의 말이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3-오대산-지친-마음을-벗고-지혜를-받으라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오대산 주봉 비로봉은 구룡령에서 만월봉-두로봉-노인봉을 거쳐 황병산으로 빠져나가는 백두대간의 주능선에서 비켜 나 있다. 그럼에도 백두대간 종주를 나서는 이들은 비로봉을 지나치지 않는다. 비로(1563m), 상왕(1491m), 두로(1421m), 동대(1433m), 호령(1561m)의 다섯봉우리가 모여야 비로소 오대산인 탓이다.
오대산은 높은 산이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움이나 뾰족함이 없다. 비로봉에 서면 설악의 화려함이나 지리의 장대함보다는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푸근함이 느껴진다. 지장암에서 만난 비구니 광문(41) 스님은 문수보살이 지혜의 완성을 상징한다고 일러주었다.
너와 나를 가르고 이긴 자와 진자를 구분하는 것은 지식일 뿐이다. 지식은 결국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이며 고통의 세계로 이끄는 번뇌를 낳을 뿐이다. 온전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 능선은 너와 나를 우리로 받아들이고 승부보다는 공생이 지고지순한 가치임을 깨우친다. 1500m에 가깝게 높이 솟았으면서도 평지에 가까울 정도로 완만한 오대산의 능선은 높이를 견주는 속세의 시야로는 읽어내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를 간직하고 있다. 어떤 이는 ‘그 무엇’을 어머니와 같은 후덕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를 죽인 조선의 태종,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음으로 내몬 세조도 결국 그 품에 안겼다. 문수보살이 종기투성이인 세조의 몸을 닦아주고, 고양이들이 자객으로부터 세조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여러 일화들은 세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이긴 자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인륜을 저버린 왕까지 보듬을 수 있었으리만큼 오대산은 넉넉한 산이다.
(사진/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 앞으로 백두대간 능선이 지나는 두로봉이 보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오대산 사찰들이 연기로 흩어질 때 상원사를 지켰던 당대의 선사 한암 스님은 잊혀져 가고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은 중공군의 합류에 힘을 얻은 인민군이 다시 38선을 넘기 직전 오대산 전 사찰에 대해 소각령을 내렸다. 절집들이 인민군들의 숙소 등으로 쓰이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였다. 모든 스님들이 절집을 비웠을 때 한암 스님만은 청량선원의 문짝들을 떼어내 불을 질러 상원사가 불타는 것처럼 위장하고 절집을 끝내 지켰다. 상원사 청량선원의 문들이 제각각 모습이 다른 것은 이때 떨어져 나간 문짝을 형편이 닿는 대로 다시 만들어 달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한암 스님의 흔적은 상원사 위 중대 사자암 뜰의 단풍나무로 남아 있다. 스님이 1926년 봉은사에서 상원사로 올 때 땅에 꽂은 지팡이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은 것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스님은 27년 동안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오대산을 물, 불, 바람의 ‘삼재’(三災)를 입지 않는 명당으로 꼽았다. 임진왜란에 선대왕들의 실록들을 뺏기고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은 선조는 오대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실록을 보관하도록 했다. 오대산 사고는 금세기에 들어서 일제의 수탈을 당하고 한국전쟁 때 불타기 전까지 수 백년 동안 이중환의 말대로 삼재를 입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은 오대산도 예외가 아니다. 수천명의 화전민들이 골짜기를 차지하고 불을 놓을 때도 변하지 않았던 오대산은 변하고 있다. 오대산을 넘어 홍천군 명개로 이어지는 북대령조차 여전히 비포장도로로 남아 있지만 절집들은 옛 모습이 버거운 모양이다. 월정사에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유치원 공사가 끝나는가 싶더니 요즈음에는 박물관을 짓느라 부산하다. 상원사도 2층 한옥으로 된 요사채를 새로 세우느라 고즈넉한 분위기를 찾기 어렵다.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중대 사자암에는 설악산 봉정암을 닮은 투시도가 새로운 불사를 알리고 있었다. 평소 무시로 드나드는 멧비둘기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곤줄박이 같은 새들도 공사가 시작되면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다.
“기도를 위해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수행입니다. 적멸보궁에 이르는 비탈길은 참 힘든 길입니다. 그 고통을 견디며 산길을 혼자 걷다 보면 저절로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광문 스님은 무엇보다 용도에 맞지 않을 정도로 커지는 절집들이 되레 신앙심을 해친다고 걱정이었다. 몸이 편해지면 마음은 게을러지고 나태해진다는 거였다.
옛 조사들은 ‘식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하고 온포(溫飽)에 생해태(生解怠)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춥고 배고플 때 소행할 마음이 나오고 따뜻하고 배부를 때 게으름이 나온다라는 옛 큰 스님들의 말이 언뜻 떠올랐다.
모든 것들이 변해가고 있는데 능선 넘어 서대 염불암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서대 염불암을 알리는 이정표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스님의 부탁으로 치워졌다고 했다. 너와지붕을 인 서대 염불암 스님은 마침 출타중이었다. 출입금지 간판이 서 있지만 그래도 찾아오는 손님들을 위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비닐을 친 샘터의 문에 자물쇠를 걸지 않았다. ‘얼음을 직접 깨면 물통이 깨질 수 있으니 통을 두드려 얼음을 깨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샘터에 칫솔은 한 자루였지만 숟가락은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출입금지 팻말을 넘는 길손의 고픈 배를 위한 배려이리라.
서대 염불암 사립문 앞 우통수는 여전했다. 우통수는 훗날 태백산 창죽동 금대산 검룡소가 한강의 시원지로 밝혀지기까지 오랜 세월 한강 물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대접받던 샘이다. 세조가 갈증을 풀기도 했다는 우통수는 단종이 마지막 숨을 거둔 영월 동강을 지나 한강으로 흘러 든다. 단종은 죽어서도 세조의 손길을 피하지 못하는 셈이다.
“기존의 지친 마음을 벗고 빈 마음으로 오라. 오대산에 들어 부처님과 자연을 마음으로 받아라.” 북방에서 제일 가는 비구니 선방이라는 남대 지장암을 지키는 광문 스님이 속인들에게 전해 달라는 초청의 말이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3-오대산-지친-마음을-벗고-지혜를-받으라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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